사적 제122호. 1405년(태종 5)에 이궁으로 조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7년(선조 40)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 1647년에 다시 짓기 시작했다. 그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으며, 특히 1833년(순조 33)의 큰 화재 때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탔으나 곧 다시 중건되었다.
1908년에 일본인들이 궁궐의 많은 부분을 변경했으며, 1917년에 큰 불이 나자 일제는 불탄 전각들을 복구한다는 명목 아래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내고는 이 가운데 극히 적은 재목들을 사용하여 창덕궁을 변형·복구했다.
이 궁궐은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7년에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 년 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궁궐의 배치는 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각들을 배치하여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꺽인 곳에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금천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진선문과 그 양옆에 월랑이 있다.
인정문은 정전의 정문이며 그 양쪽에 있는 월랑은 'ㄷ'자형으로 인정전을 감싸고 있다.
ㄷ자형의 마당 안에는 인정문으로부터 시작된 어도가 있고, 그 북쪽 끝에 있는 중앙의 높은 월대 위에는 정전인 인정전이 자리잡고 있다. 인정전 월랑의 동북쪽에는 편전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선정전의 주위에는 여러 행각이 있는데, 그 남쪽에 있던 여러 칸의 행각들은 일본인들이 모두 헐어버렸고, 뒤쪽에 있는 행각만 남아 있다. 동북쪽에는 희정당과 내전인 대조전 영역이 서남향으로 지세에 맞추어 배치되어 있다.
〈궁궐지〉에 희정당은 편전으로, 또 〈동궐도〉에는 중층 누각으로 되어 있어 현재의 모습과 다르다. 희정당으로부터 구름다리 모양의 행각이 북쪽으로 뻗어 희정당 자리보다 높게 자리잡은 대조전은 침전으로 장방형의 행각이 둘러싸고 있고, 이 뒤쪽으로는 아름다운 후정이 조성되어 있다. 대조전 영역의 동남쪽에 내의원이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낙선재, 승화루, 백칸 안쪽에 이르는 행각들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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